[카테고리:] Ennui

  • 기억의 자리

    기억의 자리

    기타노 다케시의 <돌스>에서 귤을 미끼로 쓴 낚싯줄에서 고기가 입질을 하는 장면이 있다. 사랑은 아무도 돌보지 않던 우연으로, 얼토당토않은 것들을 이유로 진동하기 시작한다. 모든 사랑의 사실적인 핵심은 우발적이다. 엄청난 우연이 그와 그의 연인을 묶지 않았던가? 여기에서부터 거꾸로 가야 한다. 그러자면 그가 선택한 기억에서, 선택해서 남겨둔 기억에서 ‘추억’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을 끄집어야 한다. 추억에도 속도라는 것이 있다며 그는…

  • 사랑, 우아한 부패

    사랑, 우아한 부패

    러브콜을 받는다는 건 자신의 가치에 대한 부름이다. 그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게 되는 것. 그가 백화점의 일류 고객이어서 바겐세일 전에 이득을 챙기는 것이든, ‘꼭 당신이어야 해요. 당신이 아니면 안 돼요.’라는 간곡함으로 어떤 소임을 수행하는 것이든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의 대상에게 무엇인가를 헌정하는 실제적인, 내적인 온갖 몸짓’ 롤랑 바르트는 이것을 ‘헌사(dédicace)’라고 말한다. ‘러브콜’은 ‘사랑’의 자리를 교묘하게…

  • 밑줄을 긋다

    밑줄을 긋다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꺼내고는 이 책 어디에 밑줄을 그었을까 들춰본다. 짚이는 대로 빼어 든 게 배수아의 <독학자>이다. 독학자라니, 이왕이면 카롤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정도가 손에 잡혔으면 줄거리만 가지고도 충분한 이바구가 됐을 걸. 한 때는 책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면서 밑줄 긋기를 꺼렸다. 그냥저냥 낙서로 여겼을 뿐이며 어떤 밑줄은 넘어오지 말라는 선으로 다가와 그쯤에서 책을 덥기도 했다.…

  • 아드리(adli)를 떠나는 사람들

    아드리(adli)를 떠나는 사람들

    참을 수 없는 것, 이라고 써놓고 내내 딴짓이다. 내게 참을 수 없는 것은 뭐가 있을까. 재미없는 책? 오토바이 소음? 버스에서 누군가의 통화로 낯모르는 이의 한 생애를 줄줄 꾀게 되는 상황? 마감을 초 앞에 둔 글쓰기조차도 곧 원고지 몇 장을 채우고는 덮을 테니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이 정도는 이전 직장의 그들보다는 훨씬 참을 만하다. 오래…

  • 무수한 편재

    무수한 편재

    김승희는 『왼손을 위한 협주곡』 자서에서 ‘죽은 사람은 하나의 不在가 아니라 무수한 遍在’라고 말한다. 사진에 대해 얘기하면서 죽음을 꺼내는 게 뜬금없어도 이 말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사진’이다. 죽음 혹은 사라진 것들, 기억에서 망각된 것들을 끄집어내는 것은 고통과 찌름으로 연속된 사물들이다. 우리의 마음을 떠난 것을 기억하는 것은 사물이다. 사물은 차츰 기억을 떠올리고 그 안에 투영된 마음까지도…

  • 황금 노트북 / 도리스 레싱

    황금 노트북 / 도리스 레싱

    『황금 노트북』은 안나 울프(Anna Wulf)에 관한 이야기이자 동시에 안나가 쓰는 이야기이다. 소설은 주인공이자 작가이면서 동시에 서술자의 역할을 하는 안나 울프의 의식세계를 파헤치고 있다. 안나의 의식은 ‘검정 노트북’, ‘빨간 노트북’, ‘노란 노트북’, ‘파란 노트북’ 네 권의 노트북과 내부의 ‘황금 노트북’ 그리고 ‘자유로운 여자들’간의 시공간을 오가며 전개된다. 처음 네 권의 노트북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안나의 여러…

  • 아홉 생명 / 어슐러 르 귄

    아홉 생명 / 어슐러 르 귄

    『바람의 열두 방향』에 실린 단편 ‘겨울의 왕’은 『어둠의 왼손』의 서막이 되는 작품이다. 어슐러 르 귄은 『어둠의 왼손』에서 게센인-양성인간을 시종일관 남성형(he)으로 씀으로써 많은 페미니스트의 비판을 받았다. 이후 르 귄은 『바람의 열두 방향』에서 「겨울의 왕」을 개정하며, he로 표기됐던 양성인간-게센인을 칭하는 보통명사를 모두 she로 바꾼다. he가 she로 바뀌면서 어떤 아이의 아버지는 she가 되는 식으로, 여/남이라는 성별이분법 자체가 뿌리째…

  • 학계에 존재하는 비가시성 / 에이드리언 리치

    학계에 존재하는 비가시성 / 에이드리언 리치

    레나토 로살도의 <문화와 진리> 서문은 에이드리언 리치의 글로 시작한다.   예컨대 선생님이라는 권위를 가진 어떤 사람이 <이것이 바로 세계다>라고 묘사를 하고 있는데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면 당신은 그 순간 심리적인 불균형을 겪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았는데 그 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때와 같다.  -애드리언 리치 『학계에 존재하는 비가시성』   도서관에서 에이드리언…

  • 소돔 120일의 구라

    소돔 120일의 구라

    책의 내용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지만 그 주변의 이야기를 양념으로 얹는다면 더 흥미진진해지기도 하다. 얼마 전 누군가 사드의 『Histoire de Juliette, ou les prospérités du vice 쥘리에트 이야기, 또는 악덕의 번영』을 빌려 달라고 해서 오만 책장을 다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Justine ou Les malheurs de la vertu 쥐스틴느, 또는 미덕의 불행』을 잘못 생각해서 가지고 있다고 한…

  • 세계여성소설걸작선

    세계여성소설걸작선

    여성해방운동의 성서로 불렸던 『여성과 노동』의 작가 올리브 슈라이너(1855~1920)는 “나는 너무도 지쳐 있고, 미래가 오기도 전에 미래에도 지쳐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에 한번이라도 고개가 끄덕여졌다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위안이다. 그가 21세기를 살았더라도 저 마음이 바뀌었을까 싶지만, 그렇다고 미래를 디스토피아로만 단정 짓고 미리부터 끔찍해 할 필요는 없다.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은 SF(Science Fiction)가 지향하는 과학적 엄밀성보다는 새로운 상상력과…